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통신사행 여정의 기록,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 : 권혜은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덕수2464)는 1748년(영조24), 조선의 통신사 일행이 부산에서부터 일본의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東京)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총 30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장면에는 통신사행의 여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명승지와 사행 중 겪은 인상적인 순간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18세기 조선,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딛다.

16세기 말~17세기 전반기, 중국과 일본의 침략을 받아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큰 전쟁을 치르며 많은 고난을 겪었던 조선은 18세기에 이르러 점차 평화와 안정을 되찾으며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시기 조선은 중국과 일본에 사행단을 파견하며 활발한 대외교류 활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조선의 외교사절단들은 몇 달에 걸쳐 멀고도 험한 길을 왕복해야만 했지만, 이국의 정치 문화적 동향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행은 넓은 세상 밖을 체험하고 새로운 문물에 접할 수 있는 더없는 계기였던 것입니다.

사행단에는 지금의 외교관 역할을 하는 삼사(三使)를 비롯하여, 군관(軍官), 의료를 담당하는 의원(醫員),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譯官), 그리고 그 밖에도 100여 명에서 많게는 5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원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행(通信使行)은 에도(江戶) 바쿠후(幕府)의 습직(襲職)을 축하하는 외교사절단으로, 이를 통해 양국의 선린우호(善隣友好) 관계를 다진다는 상징적인 명분을 지녔습니다. 그들은 한양을 출발해 부산에 도착한 뒤 쓰시마 섬(對馬島) 도주(島主)의 안내를 받아 바닷길을 이용해 일본에 발을 딛고, 각 번(藩)의 향응을 받으며 바쿠후가 있는 에도에 도착하는 여정을 거쳤습니다.

당시 조선 이외에 대부분의 외교가 단절되었던 일본에서는 바다 건너 통신사행단을 맞이하는 것이 큰 행사였기 때문에, 도착지마다 성대한 환영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글과 그림으로 생생히 묘사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일본 내 통신사행로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지식인들은 각 지역에 도착하는 통신사 일행을 만나 자주 접할 수 없었던 선진문물을 습득하고자 애썼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통신사행단에는 문예에 능한 자들이 적극 참여하게 됩니다. 글을 잘 짓고 글씨를 잘 쓰는 관리를 선발하여 일본인들과 필담이나 시를 교환하고 문서를 기록하는 제술관(製述官), 사자관(寫字官), 서기(書記) 등에 임명하였습니다. 여기에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樂工), 말 위에서 곡예를 펼치는 마상재(馬上才)까지 포함된 점 역시 통신사행이 문화사절단으로서의 성격을 지녔음을 잘 말해줍니다.

조선시대 사행단 일행의 여정은 그들이 남긴 수많은 여행 기록과 그림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국에 대한 호기심 어린 기록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겪은 다양한 일화와 인상적인 사건들이 남아있습니다. 사행단의 일원 중 화원(畫員)은 이국의 풍경과 지도들을 그리거나 현지의 서화가들과 만나 글과 그림을 나누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국내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인상적인 사건이나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 역시 화원의 주요 임무였습니다.

사로승구도, 1748년 무진년 통신사행의 기록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는 부산(釜山)에서 에도(江戶)에 이르는 통신사행의 전 여정을 담은 작품입니다. 현재 중국으로 떠난 연행(燕行)의 여정을 그린 조선의 회화는 여러 점이 전하고 있는 데 비해,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행의 여정을 담은 우리의 옛 그림은 이 작품이 유일합니다.

총 30폭의 화면이 15장면씩 각각 상·하 두 개의 두루마리로 나뉘어 실린 이 작품에는 조선의 출발지인 부산에서 일본의 에도에 이르기까지 각 도착지들의 경관과 일본의 명승지들이나 사행 중 현지에서 겪은 인상적인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이성린,《사로승구도》중 <부산>

이성린,《사로승구도》중 <부산>, 1748년, 종이에 엷은 색, 각 35.2 x 70.3cm

상권의 15면이 사행의 주요 경유지들을 골고루 포함한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畫)로 이루어졌다면, 하권의 15면에는 회화식 지도나 풍속화(風俗畫), 기록화(記錄畫) 등과 같이 다양하고 복합적인 성격의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어 흥미를 끕니다.

이 작품에는 각 장면의 제목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글도 적혀있지 않지만, 『해행총재(海行摠載)』와 같은 통신사행 기록과 비교해보면 1748년 조선의 열 번째 통신사행 시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행의 수행화원(隨行畫員)이었던 도화서(圖畫署) 화원(畫員) 이성린(李聖麟, 1718~1777)은 일본의 경승지들을 조선의 화풍으로 그려냈습니다. 작품에 묘사된 실경을 당시 지도나 회화작품과 비교해보면 포구 형태나 특정 기물이 일치하여 실경에 매우 충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낯선 이국의 풍경을 그린 것이므로 여러 차례 다녀오지 않은 이상 곳곳의 지형과 경물들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화원 이성린은 해당 지역을 스케치하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보완하여 그림을 마무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당시 사행기록이나 해당 지역의 지도와 그림 등을 참고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작품 곳곳에는 1748년 통신사행 때 발생했던 사건이나 사행원들이 인상 깊게 본 모습들 역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훗날 작품을 완성하면서 사행기록들을 참고했음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5월 17일에 보았다는 후지산(富士山)이 《사로승구도》에는 6월 17일으로 적혀 있는데, 이 날은 조선으로 돌아가던 중 요시와라 관소(吉原館)에서 후지산을 선명하게 감상했던 때입니다.

이성린,《사로승구도》중 <6월17일 요시와라 관소에서 본 구름 낀 후지산>

이성린,《사로승구도》중 <6월17일 요시와라 관소에서 본 구름 낀 후지산>, 1748년, 종이에 엷은 색, 각 35.2×70.3cm

하권의 10번째 장면인 <오이가와 건너기(涉大定川)>는 급류가 심한 시즈오카(靜岡)의 오이가와(大井川)를 건너는 모습을 그렸는데, 오이가와의 ‘井’자가 ‘定’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이 통신사 일행을 직접 들것으로 메거나 업고 강을 건너는 모습은 우리나라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광경입니다. 특히 인물들의 부자연스러운 묘사는 도화서 화원이었던 이성린이 다양한 자세를 취한 인물이나 알몸인 인물들을 그리는 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이성린,《사로승구도》중 <오이가와 건너기>

이성린,《사로승구도》중 <오이가와 건너기>, 1748년, 종이에 엷은 색, 각 35.2×70.3cm

마지막 장면인 <간바쿠의 잔치(關白讌享)>는 통신사 일행이 가장 중요한 임금의 국서(國書)를 바쿠후의 수장인 간바쿠(關白)에게 전달하는 행사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이국적인 일본의 건물 묘사와 함께 다이묘(大名)를 비롯한 많은 일본인들이 참석한 엄숙한 행사의 현장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이성린,《사로승구도》중 <간바쿠의 잔치>

이성린,《사로승구도》중 <간바쿠의 잔치>, 1748년, 종이에 엷은 색, 각 35.2×70.3cm

이처럼《사로승구도》에서는 30면에 이르는 화폭에 이국의 인상적인 경치와 모습들을 다채롭게 묘사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흥미로운 장면들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육로사행이 시작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바닷길을 이용한 사행 때에는 포구(浦口)가 있는 경치를 위주로 그릴 수밖에 없었지만, 육로로 이동하게 되면서 직접 다양한 경물을 볼 기회가 더욱 많아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사로승구도》는 조선인들의 눈으로 본 18세기 일본의 경치와 풍습들을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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